복귀역사
아담에서재림까지
통일원리는 역사를 거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하나의 선으로 읽는다. 아래의 각 갈림길에서는 먼저 조건을 읽는다 — 누가 그 자리에 섰으며, 그에게 무엇이 요구되었는가. 그다음에 두 갈래의 답이 있다. 뜻하신 노정은 거기서 멈추고, 실제로 걸어간 노정은 페이지 반대편으로 건너가 계속 이어진다.
역사가 갈라진 곳
복귀역사는 계획이 아니다. 계획 대신 일어난 일이다 — 하나님이 뜻하신 선은 첫 세대에서 멈추었고, 아래의 모든 것은 그 선 없이 이어져 온 갈림길이다.
아담과 해와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에덴동산에서 성숙을 향해 자라고 있다. 성숙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한 가지 계명을 지켜야 하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결혼하여 인류의 참부모로서 죄 없는 혈통을 시작해야 한다.
아담과 해와는 성숙에 이르러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결혼하고, 죄 없는 혈통의 참부모가 된다. 첫 세대에서 지상천국이 시작된다. 복귀할 것이 없으므로 복귀역사도 없다.
타락
대가: +6,000년『원리강론』은 타락을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행위로 읽는다. 누시엘은 천사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였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되어 자신보다 더 큰 사랑을 받자 그는 자기가 받는 사랑이 줄어든 것처럼 느꼈고, 그 마음에서 해와를 유혹하였다 — 이것이 영적 타락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본래 상대가 아담이었음을 새로 알게 된 해와는, 둘 다 성숙하기 전에 아담을 부부 관계로 끌어들였다 — 이것이 육적 타락이다. 그들의 자녀에게 전해진 것은 나쁜 본보기가 아니라 혈통이었다.
이 아래의 모든 것은 우회로다. 다섯 시대, 약 6,000년,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대체의 사슬 — 그 전부가 인류가 이미 한 번 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수고다.
I. 아담에서 노아까지
약 1,600년 · 아담 → 노아
한 가정 안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첫 시도들. 각 시도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제물을 드려 세우는 믿음의 기대, 그리고 가인의 입장에 선 사람이 아벨의 입장에 선 사람에게 굴복할 때 세워지는 실체기대다. 두 번이나 앞의 것은 세워지고 뒤의 것은 무너진다.
아담이 직접 제물을 드릴 수 없었던 이유
기원전 4000년경아담은 하나님과도 사탄과도 동시에 관계를 맺은 중간위치에 서 있었고,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상징적으로 두 아들로 나누시어 각각 따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다. 그 입장은 임의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해와의 사랑의 첫 열매인 가인은 그녀의 첫 번째 타락 행위를 대표하여 사탄과 상대하는 입장에 섰고, 둘째 열매인 아벨은 두 번째 타락 행위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상대하는 입장에 섰다. 이때부터 복귀는 둘째 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원리강론』 162쪽아벨의 제물이 열납되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다(창 4:4).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었고, 열납될 만한 방식으로 제물을 드렸다.
타락한 인간이 처음으로 세운 조건이다. 아벨은 아담을 대신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고, 그로써 실체헌제의 중심인물이 될 자격을 얻는다 — 이제 가인이 굴복해야 할 사람이다. 가인의 제물이 거절된 것은 미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선 입장에서는 먼저 조건을 세워야 했고, 그 조건이란 타락성본성을 벗는 것이었다.
『원리강론』 163쪽형 가인
아담의 두 아들이 타락한 인류의 첫 제물을 드린다.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이제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네 가지이며, 하나하나가 타락 때 천사장이 저지른 행동을 되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벨을 사랑할 것, 아벨의 자리를 빼앗지 말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 그의 주관을 받을 것,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번식할 것.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대가: +10대 · 1,600년그는 순서를 뒤집어 아벨을 죽인다 — 천사장이 해와를 영적으로 죽인 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 제물은 가인 자신의 책임분담이었고, 다른 누구의 몫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벨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공로로 삼아 하나님은 그를 대신할 셋을 세우신다(창 4:25).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 이 페이지의 나머지 전부를 지배한다.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지만, 어떤 개인에 대한 예정은 조건적이다. 사람이 실패해도 뜻은 실패하지 않는다 —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뿐이다.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한다. 두 사람은 함께 그 조건을 인정받고, 아버지 아담도 그들과 함께 풀려나며, 가정 전체가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 선다. 메시아는 아담의 집안에서 태어나신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다
아담으로부터 10대, 1,600년이 지나, 노아는 끊임없는 조롱 속에서 절대 순종하며 120년 동안 산 위에서 방주를 짓는다. 방주는 우주 전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세 층은 성장의 세 단계를, 여덟 식구는 아담 가정의 여덟 식구를, 짐승들은 자연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40일 홍수가 이어진다.
상징헌제가 열납되고 믿음의 기대가 복귀된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는 본래 아브라함이 아니라 노아가 받을 것이었고, 나중에야 옮겨 갔을 뿐이다. 7일 간격으로 세 번 날려 보낸 비둘기는 그 뒤에 올 모든 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힌다. 첫째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한다 — 아담이다. 둘째는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온다 —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실 예수님이다. 셋째는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 — 재림주이시며, 그 이후로는 이상이 다시는 지상에서 거두어지지 않는다.
『원리강론』 168쪽노아의 둘째 아들 함
노아 가정에서 아벨의 입장에 선 사람은 함이고, 가인의 입장에 선 사람은 셈이다 — 흔히 알려진 이야기와는 반대다. 상징헌제를 드린 것은 함이 아니라 노아였으므로, 함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는 아버지와 마음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가 벌거벗고 눕게 하시어,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에덴의 순결을 되찾게 하신다.
함은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숨길 것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노아 가정은 복귀된 에덴의 순결을 지키고, 실체기대가 완성되며, 섭리는 홍수 후 단 한 세대 만에 한 가정 안에서 끝맺는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다
대가: +400년함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형제들까지 부추겨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며, 그들은 뒷걸음질로 다가가 아버지를 덮는다.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혈연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사탄이 기다리던 고백이었다. 보통이라면 아버지를 덮어 드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여기서 죄가 된 까닭은, 오직 이 가정만이 그 혈연관계가 사라졌음을 증명하도록 요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1,600년을 찾아 노아를 얻으셨고, 120년을 더 인도하셨다. 작은 멸시의 행동 하나가 그것을 무너뜨렸다. 같은 가정에서는 기대를 다시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은 10대 400년을 기다리신 다음, 새 땅에서 새 중심인물과 함께 다시 시작하신다.
II.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가정적 기대를 세우려는 세 번째 시도다 — 원리에 따르면 세 번째 시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루어진다. 다만 아브라함이 먼저 실패한 뒤의 일이며, 그 대가는 그의 후손에게 넘겨진다.
- 제1시대 — 함의 실패: 10대와 40일 홍수심판이 함께 상실되었다. 이제 그 10대 하나하나를 그 길이 전체에 걸쳐 복귀해야 한다 — 40일이 아니라 40년씩. 노아에서 아브라함이 부름받기까지 정확히 400년이 흐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르에서 부름받은 아브라함
기원전 2000년경바벨탑 이후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서 — 『원리강론』이 지적하듯 그 탑을 쌓은 것은 함의 후손이었고, 그래서 언어가 혼잡해졌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는 우상숭배자 데라의 장자였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택함받았다. 사탄이 차지한 함을 복귀하시려면, 하나님은 사탄이 가장 귀히 여기는 사람을 되찾아 오셔야 했다. 아내와 조카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감으로써, 아브라함은 표본노정을 걷는다. 야곱은 하란에서, 모세는 애굽에서 나오며 그 길을 되풀이하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이끌고 사탄 세계에서 나오시며 그 길을 걸으신다.
『원리강론』 174쪽바로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사라
기원전 2000년경제물을 드리기 전에 아브라함은 먼저 아담 가정을 상징적으로 복귀해야 했다. 천사장이 해와를 빼앗았을 때 아담과 해와는 아직 남매의 관계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 칭했다가 사탄의 입장에 선 바로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그다음 그녀를 아내로 되찾는다. 인류를 대표하는 롯과 자연 세계를 대표하는 재물도 함께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했다. 예수님도 같은 노정을 걸으시게 된다.
『원리강론』 175쪽아브라함
제물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숫양과 암염소, 그리고 암소다 — 소생·장성·완성의 세 단계가 한 제단 위에 모두 놓여, 아담과 노아가 잃은 모든 것을 한 세대 안에 복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하나하나를 둘로 쪼개야 한다. 선과 악을 가르고, 사망의 피를 빼내기 위해서다(창 15:9-11).
새를 쪼개지 않다
대가: +400년 애굽 고역그는 짐승들은 쪼개고 새는 쪼개지 않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려앉는다. 쪼개지 않은 제물은 여전히 사탄의 소유로 남은 제물이다 — 그리고 소생 단계의 비둘기가 그렇게 남았기 때문에, 그 위에 쌓아 올린 숫양과 암소도 함께 넘어갔다. 가인의 제단을 지켜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까마귀가 되어 노아의 방주 위를 맴돌았던 것처럼, 사탄은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한 생애 안에서 횡적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 세 대에 걸쳐 종적으로 이룬다. 하나님은 세 사람을 한 사람으로 여기신다 — 야곱의 승리가 곧 이삭의 승리이고, 이삭의 승리가 곧 아브라함의 승리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신다. 그 연장의 대가는 그의 후손이 400년 애굽 고역으로 치른다.
세 가지 제물이 쪼개져 열납된다. 아브라함은 아담 가정과 노아 가정에 걸쳐 쌓인 모든 것을 한 세대 안에 복귀하여 온전히 믿음의 조상이 되고, 민족적 기대가 곧바로 시작된다 — 애굽도 없고, 400년도 없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약속 전체가 달려 있는 아들을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에 이르러 이삭을 묶고 칼을 든다. 이삭은 나무를 질 만큼,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만큼, 그리고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자라 있었다 —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가 저항했다면 그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믿음은 아버지의 믿음만큼 컸다. 천사가 그 손을 멈추게 하고, 대신 수풀에 걸린 숫양이 바쳐진다.
절대적으로 결단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에 섰고, 사탄은 그 아들에게서 완전히 분립되었다 — 하나님께서 “이제야 아노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이 그것이다. 두 사람 모두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다. 아브라함은 제단에서 실패했던 자기를 죽이고, 이삭은 다시 돌려받는다. 그다음 그 숫양이 상징헌제가 되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고 사명을 계승한다. 산에 이르기까지 걸린 사흘은 영원한 형식이 되었다 — 하란을 떠나는 야곱, 애굽을 떠나는 모세, 무덤 속의 예수님.
『원리강론』 179쪽아벨의 입장이 한 대 아래로 내려가다
아브라함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 이스마엘이 타락성본성을 벗는 아벨과 가인의 짝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실패했기 때문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입장으로 올라섰고, 가인·아벨의 과제는 이삭의 아들들에게 내려갔다. 에서는 사탄이 침범한 첫 번째 제물의 입장을, 야곱은 사탄이 분립된 이삭 헌제의 입장을 이어받는다. 그들이 태중에서부터 싸운 것은 이미 서로 반대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원리강론』 181쪽브니엘에서 에서에게 절하는 야곱
세 번의 승리가 차례로 이어진다. 야곱은 떡과 팥죽으로 장자권을 산다 — 육과 영, 사탄이 더럽힌 두 가지다. 그는 사탄 세계를 상징하는 하란으로 가서, 21년의 고역과 열 번이나 바뀐 품삯을 견디며 라반에게서 가정과 재물을 되찾는다. 돌아오는 길에 얍복 나루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그리고 가축 떼를 앞서 보내고, 자기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형 앞에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한다 — 에서는 달려와 그를 껴안고, 둘은 함께 운다(창 33:4).
에서가 스스로 굴복함으로써 타락성본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실체기대이며, 가인과 아벨, 셈과 함의 실패를 한꺼번에 복구한다. 야곱은 또한 타락한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권을 복귀한 사람이다 —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기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세는 이 노정을 형상으로, 예수님은 실체로 다시 걸으신다. 이 페이지에 나오는 이후의 모든 노정은 더 큰 규모의 야곱 노정이다.
『원리강론』 182쪽기대는 세워졌으나 — 메시아는 아직 오실 수 없다
기원전 1900년경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모두 세워짐으로써, 이삭 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완성되었다. 아담이나 노아의 시대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들을 공격할 경쟁 가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는 이미 제국들이 있었다. 애굽과 맞서셔야 할 메시아를 가정 차원의 기대로는 맞이할 수 없었으므로, 같은 기대를 이제 주권을 가진 국가의 규모로 다시 세워야 했다 — 그러려면 먼저 애굽, 그리고 400년이 필요했다.
『원리강론』 184쪽III.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
400년 · 요셉 → 모세 → 여호수아
섭리는 가정에서 민족으로 넓어진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역 속에서 민족으로 형성되고, 모세의 인도로 그곳을 나온다 — 세 차례의 민족적 노정을 거치며, 그중 두 번은 완전히 실패한다.
- 제2시대 — 쪼개지 않은 새: 400년의 애굽 고역은 그 제물의 대가다. 동시에 그것은 민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탄을 분립하는 이 기간을 통해 이스라엘은 노아와 아브라함이 각자 사명을 시작할 때 섰던 자리에, 이번에는 민족적 규모로 서게 된다.
르우벤은 죄로 인해 장자의 지위를 잃는다(창 35:22). 왕의 계보는 유다에게, 갑절의 축복은 요셉에게 넘어간다. 메시아의 계보가 정해진다 — 다윗과 예수님은 유다에게서 나오시게 된다.
『원리강론』 162쪽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일부러 손을 엇갈려 오른손을 동생의 머리에 얹는다(창 48:14). 이쯤 되면 이 형식은 하나의 교리가 된다 — 『원리강론』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일과 오직 레위인만이 법궤를 멜 수 있었던 일에서도 같은 법칙을 읽는다.
『원리강론』 162쪽애굽으로 내려간 요셉
기원전 1800년경요셉은 하나님 편 아내인 라헬의 아들이자 레아의 아들들의 동생이었으므로 아벨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피해 종으로 팔려 사탄 세계로 들어가고,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그러자 형들과 아버지가 와서 그에게 절한다. 이 모든 형태가 예수님에게로 이어져 읽힌다. 사탄 세계로 들어가 고난의 길을 걸으시다가, 서른 살에 만왕의 왕으로 나타나시고, 그 앞에 조상들까지 굴복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191쪽애굽에서의 430년
기원전 1800~1450년경갚아야 할 빚은 400년이었다.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고난을 겪었다 — 갚아야 할 것보다 30년이 더 많았다. 하나님은 그 초과된 세월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바로 그 때문에 모세는 애굽을 칠 자격을 얻었다.
『원리강론』 197쪽바로의 궁중에서 보낸 모세의 40년
사탄 세계의 한복판에서 자라면서도, 몰래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가르침을 받은 모세는 40년의 안락한 궁중 생활 내내 자기 민족이라는 의식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 백성과 함께 학대받기를 택했다.
그 40년은 사탄분립을 위한 하나의 완결된 기간이며, 이로써 모세는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운다. 아벨, 노아, 이삭과 달리 그에게는 상징헌제가 전혀 필요 없다. 그는 이미 열납된 그들의 세 제물 위에 서 있으며, 제물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관계 맺는 시대로 넘어갔다.
『원리강론』 194쪽모세를 지켜보던 이스라엘 백성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40년을 채우고 믿음의 기대를 세웠다. 히브리 사람 하나가 매 맞는 것을 보고 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다 — 『원리강론』은 이 행동을 하나님께서 친히 노정을 시작하신 방식으로 읽는다. 장자의 입장에 선 사탄 편을 굴복시키고, 모세를 궁중으로부터 영영 끊어 놓은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향한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를 믿고 따른다. 그들은 블레셋 땅의 길이라는 직행로로 올라가 21일 만에 가나안에 이르고, 하란에서 보낸 야곱의 21년을 복귀한다. 홍해도 광야도 없고 — 석판도, 법궤도, 성막도 전혀 필요 없다.
모세에게 등을 돌린 이스라엘
대가: 가나안으로 가는 직행로히브리 사람 하나가 매 맞는 것을 보고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다. 『원리강론』은 이 살인을 하나님께서 친히 노정을 시작하신 행위로 읽는다 — 그것은 장자의 입장에 선 사탄 편을 굴복시켰고, 모세를 궁중으로부터 영영 끊어 놓았으며, 그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를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었다. 실패한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튿날 한 히브리 사람이 그 일을 그에게 되던진다 —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 그리고 모세는 도망쳐야 한다.
사탄은 모세가 궁중에서 보낸 40년을 다시 빼앗아 가므로, 믿음의 기대를 아무것도 없는 데서 다시 세워야 한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더 보내는 동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의 삶은 불신의 대가로 더욱 고달파진다.
세 가지 표징, 열 가지 재앙, 그리고 홍해
뱀이 되는 지팡이, 나병이 들었다가 낫는 손, 피로 변하는 물 — 이어서 라반이 야곱을 열 번 속인 일에 대응하는 열 가지 재앙, 그리고 지팡이로 갈라진 바다. 이스라엘은 보고, 믿고, 따른다.
노정을 시작하는 두 번째 섭리로, 첫 번째를 허비했기 때문에 첫 번째보다 더 큰 은혜로 주어졌다. 모든 요소가 앞날을 향해 읽힌다. 지팡이는 예수님이고, 두 번 품에 넣었던 손은 천사장이 더럽힌 것을 복귀하시는 예수님과 그 신부이며, 아홉째 재앙의 사흘 동안의 흑암은 그분이 오실 때 빛과 어둠이 갈라짐을 뜻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는 동안 모세를 믿는 것이 조건이었던 적은 없다 — 조건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끝내 그를 믿는 것이었다.
『원리강론』 196쪽시내산 기슭의 이스라엘
모세는 산 위에서 40일 금식하며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있다. 산 아래 백성은 그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금식 기간 내내 순종을 지키는 것이 조건의 전부다.
금송아지
대가: 성막을 위한 첫 번째 기대모세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해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한다. 산 아래에서 백성은 아론을 다그쳐 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 부른다. 모세는 산을 내려오며, 석판도 내던진다.
두 석판은 말씀의 실체인 제2의 아담과 해와, 곧 예수님과 그 신부를 상징했다. 석판을 깨뜨린 일은 보이는 그대로를 예고하였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백성이 믿지 않는다면, 그분은 신부와 함께 사명을 완성하지 못한 채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기다린다. 석판은 그대로 남고, 성막은 첫 시도에 세워지며, 백성은 그 성막을 앞세우고 가나안에 들어가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메시아를 맞이한다.
두 번째 석판, 그리고 세워진 성막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쓰시기 전에 모세가 직접 빈 돌판을 다듬어야 했고, 다시 40일을 금식해야 했다. 백성은 그를 기다렸고, 그다음 그의 지휘 아래 법궤와 성막을 만들었다.
성막을 위한 기대가 완성된다. 성막의 목적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사람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대상을 세워 두어,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받들고 있는 한 섭리가 설 자리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 계주에서 바통이 넘겨지듯이.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깨진 석판을 복귀한 일도 앞날을 향해 읽힌다. 부활 후 40일이 예수님께 새 출발을 드릴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원리강론』 205쪽열두 정탐꾼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끌려 나와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땅의 문턱에 서 있다. 열두 지도자가 그 안에서 40일을 보내고, 이제 민족 전체가 이미 받은 약속을 믿고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충성된 두 정탐꾼을 믿고, 21개월 노정을 마치며 가나안에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가 오실 때 준비된 채로 그곳에 서 있다.
겁에 질려 돌아온 정탐꾼들
대가: 21개월이 40년으로열두 지도자가 가나안에서 40일을 보낸다. 열 명은 그 땅이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며, 그곳 사람들 곁에서 자기들은 메뚜기 같았다고 보고한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올라가자고 말한다 — 그러자 백성은 그 둘을 돌로 치려 한다.
정탐한 하루를 1년으로 친 것이다. 성인으로 애굽을 떠난 세대는 광야에서 죽게 된다 — 40일 동안 믿음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이 손을 놓았을 때에도 성막을 위한 기대를 온전히 지킨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모세
광야 생활 후반, 백성이 다시 목말라 원망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라고 하신다. 명령은 정확하다 — 한 번이다. 반석은 그리스도이며, 생명나무이며, 완성한 아담이다. 한 번 쳐서 물을 내면, 그것은 생명수의 근원으로서의 아담을 복귀한다.
반석을 두 번 친 모세
대가: 모세는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라고 하신다. 한 번 쳐야 했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격분한 그는 반석을 두 번 친다. 반석은 그리스도이며, 생명나무이며, 완성한 아담이다. 한 번 쳐서 물을 내면, 그것은 생명수의 근원으로서의 아담을 복귀한다. 이미 물을 낸 뒤에 두 번째로 쳤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이 세워졌다.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그 경계 밖에서 죽고, 그의 시신이 어디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 그 하나하나가 겟세마네와 십자가와 빈 무덤으로 이어져 읽힌다. 그런데도 반석에서는 여전히 물이 나왔다. 내적으로 모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여호수아가 성막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 예수님이 가나안을 영적으로만 복귀하시게 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내리침. 이스라엘은 경외심에 모세와 하나가 되고, 노정은 반석에서 다시 시작되며, 훗날 사탄이 예수님께 손을 댈 수 있게 한 조건은 결코 세워지지 않는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취한 여호수아
이번에는 정탐꾼이 둘이었고, 보고는 충성스러웠다. 사흘의 노정을 지나 법궤가 앞장서자 요단강이 그 앞에서 갈라진다. 강바닥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유월절을 지키며, 만나가 그친다. 엿새 동안 여리고를 돌아도 아무 일이 없다가,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자 성벽이 무너진다. 그 뒤로 서른한 명의 왕이 쓰러진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가 부모 세대가 잃은 것을 완성하고, 민족적인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진다 — 다만 아직 왕국이 아닌, 주권 없는 백성으로서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미완의 노정을 이어받은 것은 『원리강론』이 재림을 설명하는 본보기다. 모세는 영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고 여호수아는 실체로 들어갔으며, 예수님이 영적으로 시작하신 것을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완성하신다.
『원리강론』 212쪽IV. 모세에서 예수님까지
약 1,400년 · 사사 → 사울 → 세례 요한 → 예수님
이스라엘은 왕국이 되고, 분열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종교적 민족으로 재건된다. 모든 시대는 사울이 40년 안에 다 갚았어야 했으나 갚지 못한 탕감에 의해 정해진다. 그 끝에 메시아가 오시지만, 영접받지 못하신다.
- 제3시대 — 광야: 애굽 → 광야 → 가나안은 이제 고정된 본보기이고,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와 있다. 남은 것은 주권 있는 왕국, 그리고 그 왕국을 통해 맞이할 메시아다.
막 그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여호수아의 세대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취했고, 민족적인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지니고 있다. 남은 일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그곳에서 세워 갈 삶의 중심에 성막을 두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받은 땅을 지키고, 성막을 그 중심에 두며, 여호수아로부터 곧바로 메시아를 위해 준비된 왕국으로 나아간다.
가나안에서 신앙을 잃은 다음 세대
대가: +400년 사사시대그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정착하여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이고, 끝내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된다. 애굽에서 얻은 400년의 사탄분립기간이 상실된다.
옷니엘부터 사무엘까지 열다섯 사사가, 사실상 봉건사회였던 체제 안에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한 몸에 지녔다. 이 시대 전체는 방금 잃어버린 400년을 다시 사들이기 위해 존재한다.
사울 왕
사울은 400년 사사시대 위에, 아브라함이 섰던 자리에 서 있으며, 그의 40년 재위는 바로의 궁중에서 보낸 모세의 40년을 복귀해야 한다. 그다음 그는 성전을 지어야 하고, 이스라엘은 성전을 받드는 그를 따름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운다. 사무엘은 아말렉에 관해 그에게 단 하나의 지시를 내린다 — 남김없이 진멸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아말렉에서 불순종한 사울
대가: +80년, 그리고 왕위사울은 400년 사사시대 위에, 아브라함이 섰던 자리에 서 있었고, 그의 40년 재위는 바로의 궁중에서 보낸 모세의 40년을 복귀해야 했다. 그다음 그는 성전을 지어야 했고, 이스라엘은 성전을 받드는 그를 따름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웠을 것이다. 그는 선지자의 명을 어기고 아각과 가장 좋은 전리품을 남겨 두고(삼상 15장), 기름부음은 그에게서 찢겨 나간다.
아브라함의 실패를 이삭과 야곱이 짊어졌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울의 실패는 또 다른 두 번의 40년 재위가 짊어진다 — 그리고 세 재위를 합하면 통일왕국 120년이 된다. 사울이 한 생애 안에 청산했어야 할 것을 이제 차례대로 치러야 한다. 남북왕조분립 400년, 포로 및 귀환 210년, 준비 400년.
사울이 순종하여 40년 안에 성전을 짓는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고, 기원전 11세기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지며, 분열 왕국도, 포로도, 침묵의 400년도 없다.
성전을 짓는 솔로몬
사울에게 주어졌고 다윗을 거쳐 연장된 섭리가, 마침내 출애굽 후 480년, 솔로몬 재위 4년에 이루어진다.
성막이 메시아의 상징이었다면 성전은 그분의 형상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메고 다니던 것이 마침내 그 땅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영토와 주권과 성전이 있다 — 이삭 시대의 가정적 기대에 없던 모든 것이다.
『원리강론』 258쪽솔로몬 왕
왕국은 절정에 이르렀고, 처음 명령받은 지 세 왕대 만에 마침내 성전이 세워졌다. 통일 왕좌는 메시아를 위한 중심적 위치에 서 있으며, 솔로몬의 과제는 자신을 포함한 민족의 신앙이 갈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솔로몬이 끝까지 지킨다. 그가 지닌 정치적 재능과, 그 무렵 애굽·미노아·메소포타미아가 쇠약했던 형편을 바탕으로 그는 근동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통일한다 — 그리고 메시아는 한 민족이 아니라 이미 하나로 모인 세계에 오신다.
솔로몬의 우상숭배
대가: +약 1,000년이방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그들의 신들에게로 돌리게 하고, 그는 그 신들을 위해 산당을 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을 떠난다 — 그래서 실체기대는 세워질 수 없고, 통일왕국이 이루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도 세워지지 않는다. 왕국은 3대째에 분열된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가인의 입장에, 남쪽의 유다는 아벨의 입장에 선다. 북조는 열아홉 왕과 아홉 왕조를 거치는 동안 의로운 통치자가 하나도 없었고, 앗시리아에 멸망하여 선민의 자격을 영원히 잃는다. 유다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다.
갈멜산의 엘리야
북조 이스라엘은 열아홉 왕과 아홉 왕조를 거치는 동안 의로운 통치자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곳에 엘리야를 보내시고,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맞서 제단에 불을 내리게 하고 그들의 제단을 무너뜨린다.
한 사람이 우상에 몸을 내어 준 왕국에서 사탄을 분립한다. 솔로몬 때 성전의 이상이 상실되자, 하나님은 이제 왕들이 아니라 선지자들 — 대선지자 넷과 소선지자 열둘 — 을 통해 일하시며 이스라엘에서 사탄의 영향을 씻어 내고, 실체성전으로 오실 메시아를 위해 길을 열어 두신다.
『원리강론』 259쪽엘리야
갈멜산은 그 일의 시작이었지 끝이 아니었다. 엘리야의 사명은 백성과 사탄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 메시아가 오실 때 주의 길이 곧게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을 마치기 전에 승천한 엘리야
대가: 사명에 두 번째 몸이 필요해진다그는 사명을 다 마치기 전에 회오리바람과 불병거로 승천한다. 사탄의 세력은 되살아나 계속 섭리를 괴롭힌다. 이 때문에 말라기는 4세기 뒤,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약속해야 했다 — 그리고 그 약속은 모든 유대인의 마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지자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엘리야는 영으로 재림하여 요한을 통해 일한다. 요한의 몸이 동시에 엘리야의 몸 노릇을 하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요한이 곧 엘리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의미가 그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승천이 만들어 낸 기대가 바로 메시아가 넘어서셔야 할 장애물이 된다. 하늘에서 선지자가 내려오기를 바라보는 백성은, 그 선지자가 처음부터 사가랴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시작한 일을 끝마친다. 선지자 자신에 의해 사탄이 이스라엘에서 분립되고, 다시 올 필요도 없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메시아는 아무 장애도 없는 민족에게 오신다.
포로, 귀환, 그리고 침묵의 400년
기원전 586년~기원후 4년바빌론에서 70년, 이어 고레스의 칙령, 그리고 포로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아래에서 개혁되기까지 다시 140년 — 모두 210년이다. 말라기가 그들을 메시아에게로 향하게 한 뒤, 페르시아·그리스·애굽·시리아·로마의 지배 아래 선지자가 하나도 없는 400년이 흐른다. 같은 시기에 하나님은 인도에 석가를, 그리스에 소크라테스를, 극동에 공자를 세우시어, 메시아가 오실 세계를 그분이 통일하실 수 있는 세계로 만드신다.
『원리강론』 262쪽믿음의 기대를 세운 세례 요한
천사가 그의 출생을 예고하고, 그의 아버지는 그것을 의심했다가 말을 못 하게 되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에야 다시 말을 하며, 온 산골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자라고, 어찌나 엄격하게 사는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찾아와 그가 메시아냐고 물을 정도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400년 사탄분립기간 위에서 부름받은 요한은 같은 섭리를 완수하고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운다. 그는 모세가 섰던 자리에 섰다 — 그를 그토록 존경하던 온 민족이 그를 따라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실체기대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베푼 세례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쌓아 온 모든 것을 넘겨 드리는 의식이었다.
『원리강론』 219쪽세례 요한
요한은 모세가 완수한 것과 같은 40년의 섭리를 완수하고, 제1차 세계적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웠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그에게 직접 계시하셨고, 그는 요단강에서 그렇게 증거했다. 민족은 그를 너무나 존경하여 제사장들이 찾아와 그가 바로 메시아냐고 물을 정도다. 남은 일은 자신의 증언을 굳게 지키고, 첫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뿐이다.
요한은 그렇다, 내가 엘리야다 하고 말한다. 온 민족이 기다리던 예언이 그들 눈앞에서 성취되고, 준비된 민족이 메시아께 인도되며, 결코 고난받으실 필요가 없었던 영광의 주 예수님은 단 하루도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신다.
자신이 엘리야임을 부인한 요한
대가: 예수님이 요한의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한다“네가 엘리야냐?”라는 직접적인 물음에 그는 대답한다. “나는 아니라”(요 1:21).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백성은 누구를 믿을지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요한은 천사의 예고와 말 못 하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와 함께 태어난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예수님은 세리들과 함께 먹고 안식일을 범하는 것처럼 보이는, 배우지 못한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믿는다. 그리고 요한을 믿는다는 것은 엘리야가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 그렇다면 메시아도 오셨을 리가 없으니, 예수님은 사칭자일 수밖에 없다. 『원리강론』은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거침없이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세례 요한의 실패였다. 훗날 요한은 옥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묻지만(마 11:3),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선구자의 자리로 내려가 친히 믿음의 기대를 다시 세우셔야 했다 — 그분이 베드로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까닭이 이것이다. 그분은 메시아이셨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 요한의 자리에서 일하고 계셨다. 요한을 위해 예비되었던 수제자의 자리는 대신 그것을 힘써 붙잡은 강인한 사람 베드로에게 돌아간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면서도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보다 작다고 예수님은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 천국에 있는 이들은 아무리 낮은 자라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섬겼기 때문이다.
광야 40일과 세 가지 시험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물리치셨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이래 사탄이 쥐고 있던 돌을 되찾으신 것이며, 이로써 개성완성이 복귀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물리치셨다. 사탄은 성전의 주인이 자기 위치에서 떨어지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믿는 이들이 분성전이 될 길이 열렸다.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시험도 물리치셨다. 만물에 대한 주관권은 앞의 두 승리로 이미 그분의 것이었다.
요한의 자리에 서신 예수님은 4,000년 동안 잃어버린 모든 40수 섭리를 40일 만에 복귀하신다 — 노아의 홍수, 모세의 세 번의 40년 노정과 두 번의 금식, 정탐 기간, 광야, 애굽. 그분은 석판과 법궤와 성막과 반석과 성전을 한꺼번에 성취하신 분이 되시고, 세 번의 거절은 하나님의 3대 축복이 복귀될 터전을 마련한다.
『원리강론』 221쪽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
4,000년에 걸쳐 쌓아 온 종교적 기대가 메시아가 태어나실 민족을 낳았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친히 믿음의 기대를 다시 세우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민족적 규모의 실체기대다 — 그래야 그분의 생애 중에 지상천국이 시작될 수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스라엘
대가: +2,000년믿음의 기대는 서 있었다. 끝내 세워지지 않은 것은 실체기대였다. 지도층은 불신했고, 유다는 그분을 팔았으며, 제자들은 흩어졌다. 하나님은 인류를 잃기보다 예수님을 내어 주기로 하셨다 — 그리고 사탄이 그분을 죽이는 데 최대한의 힘을 썼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분을 부활시키는 데 최대한의 힘을 쓰실 수 있는 권한을 얻으셨다.
4,000년에 걸쳐 쌓아 온 종교적 기대가 그분을 직접 따랐던 작은 무리에게 넘어간다. 십자가도, 재림의 필요도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둘 다 아무도 감당하지 않은 책임의 결과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영접한다. 하나님은 이미 이 민족을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두시고 그 사회를 민주적인 방향으로 형성하시어, 메시아가 자기 백성의 뜻으로 왕으로 추대되실 수 있게 하셨다 — 그리고 그러한 공적 지지를 업고,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그 위에 길을 닦아 놓은 로마 제국이 그분의 생애 안에 돌아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세계적 통치권 위에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신다. 그분은 살아서 결혼하시고 참가정을 이루시며, 1세기에 지상천국이 실현된다.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기다려야 할 재림도 없다.
부활에서 오순절까지 — 영적 기대
부활과 승천 사이의 40일은 사탄분립을 위한 또 하나의 기간으로, 요한의 자리에서 영적으로 걸으신 노정이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고,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하여 열둘이 다시 채워지며, 오순절에 성신이 강림한다.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가 완성되고,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참부모로 서시어 사탄이 들어올 수 없는 부활권으로 사람들을 중생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것일 뿐이다. 원죄는 육신을 통해 전해지므로 몸은 여전히 공격에 열려 있다 — 『원리강론』의 표현으로,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의 직계 혈통의 자녀가 아니라 양자인 까닭이 여기에 있으며, 바울이 성신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양자 될 것을 기다리며 탄식한다고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원리강론』 226쪽V. 예수님에서 재림까지
약 2,000년 · 사도 → 샤를마뉴 → 종교개혁 → 오늘날
재림을 준비하는 시대. 『원리강론』은 이 시대를 모세에서 예수님까지의 시대와 시대마다, 기간마다 정확히 평행하는 것으로 읽는다 — 같은 노정을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 두 번째로 걷는 것이다.
- 제4시대 — 예수님을 배척함: 바울의 해석에서 이방인이 그 사명을 이어받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유대 민족이 지녔던 사명을 이어받는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섭리 전체가 단 한 번의 거부에 대한 탕감이다.
이 시대가 앞 시대와 그저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원리강론』은 이 시대가 앞 시대를 기간마다 같은 길이로 되풀이한다고 본다 — 섭리적 동시성이다. 각 기간이 같은 탕감을 두 번째로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두 선을 나란히 놓고 서로 견주어 읽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리가 바로 여기다.
로마보다 오래 살아남은 기독교
애굽의 400년을 복귀하는 400년의 박해. 이스라엘이 할례와 제물로 스스로를 정결하게 지켰듯이, 기독교인들은 세례와 성찬으로 순결을 지켰다. 이윽고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92년 테오도시우스가 국교로 정하며, 신약성경의 정경이 모인다.
모세가 표징과 재앙으로 바로를 꺾었다면, 여기서는 같은 승리가 내적으로 거두어진다 — 기적이 아니라 황제들의 마음을 움직여서다. 지금은 내적 조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사탄 제국 한가운데서 가나안을 영적으로 복귀했고,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에게 석판과 성막이 그러했던 것이 그들에게 된다.
『원리강론』 255쪽교구장제 기독교회
392~800년총대주교와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같은 종류의 봉건사회 위에서 사사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세 겹의 직분을 맡는다. 하나님은 서유럽에 새로 들어온 게르만 민족을 새로운 선민으로 세우신다. 그리고 같은 실패가 되풀이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정착하여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듯이, 교회는 자신이 개종시킨 이교 부족들의 종교와 문화를 흡수하고, 신앙은 그로 인해 혼탁해진다.
『원리강론』 256쪽샤를마뉴의 대관, 800년
레오 3세가 그를 기독교 세계 최초의 황제로 대관한다. 사울이 400년 사사시대 위에 섰던 것처럼 400년 교구장제 기독교회 위에 선 샤를마뉴는, 사울이라는 왕에 대응하는 황제다. 교황은 대제사장의 자리에, 수도원 개혁자들은 선지자의 자리에 선다.
『원리강론』은 그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샤를마뉴가 황제로 대관되었을 때 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웠다. 그 제국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을 실제 기독교 국가로 실현했다. 그때 제2이스라엘이 — 이스라엘이 사울을 따랐어야 했듯이 — 그를 따랐다면, 교황의 영적 왕국과 황제의 지상 왕국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9세기에 재림을 위한 기대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원리강론』 258쪽황제들과 교황들
샤를마뉴가 대관되었고 믿음의 기대가 서 있다. 교황은 대제사장의 자리에, 황제는 왕의 자리에 있다. 영적 왕국과 지상 왕국이 이미 세워진 기대 위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가 되기만 하면, 그리스도는 그 위로 재림하실 수 있다.
교황과 황제가 이미 서 있는 영적 기대 위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조화를 이루고, 그리스도가 9세기에 그 터전 위로 재림하시며, 교회 분열도, 십자군도, 아비뇽도, 종교개혁도 없다. 개혁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와 교황이 버티지 못하다
대가: +700년황제들은 실체헌제를 위한 아벨의 입장을 떠나고, 교황들은 자기들이 서야 할 영적 기대를 끝내 세우지 못한다. 통일왕국이 3대째에 분열했듯이 이 왕국도 그러하다. 샤를마뉴의 손자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지고, 919년에 이르러 동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서쪽의 프랑스로 자리 잡는다.
분열 왕국 시대의 모든 탕감을 이제 기독교 세계 안에서 두 번째로 치러야 한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이사야를 보내셨듯이 아퀴나스와 프란치스코를 보내신다. 교황청이 내적으로 개혁하려 하지 않자, 외적으로 징계를 받는다 — 『원리강론』은 십자군을 그렇게 읽는다. 1095년부터 여덟 차례, 거듭 패배하면서 교황청은 신망을 잃고 봉건 영주들은 권력과 재물을 함께 잃는다.
아비뇽, 교회 대분열, 그리고 공의회
1309~1517년1309년 필리프 4세가 클레멘스 5세를 압박해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게 하고, 이후 70년이 프랑스 왕들의 지배 아래 흐른다 — 바빌론 70년과 정확히 평행한다. 그레고리우스 11세가 1377년 로마로 돌아오지만, 이어서 대립 교황들이 나타나 한때는 셋이 동시에 서기도 하다가,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그들 모두를 물러나게 한다. 공의회 운동은 로마 교회를 입헌군주제로 만들려다 실패하고, 공의회들은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고 위클리프를 단죄한다. 그 순간 종교개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원리강론』 261쪽종교개혁, 1517년
위클리프는 이미 영어 성경을 내세워 성경을 사제직 위에 두었다.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자 루터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은 츠빙글리와 칼뱅,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로 번져 간다. 130년에 걸친 종교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다.
이것은 다시 세워진 믿음의 기대다. 귀환한 포로민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 아래에서 개혁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다시 세웠던 것과 꼭 같다. 이로써 재림을 위한 400년 준비 기간이 열린다. 말라기에서 예수님까지의 400년에 평행하는 기간이다.
『원리강론』 263쪽가인형과 아벨형으로 갈라진 근대
1400~1789년중세의 삶은 본성을 두 방향에서 동시에 억눌렀으므로, 그 회복도 두 갈래의 운동으로 찾아왔다 — 『원리강론』은 근대 전체를,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행하셨던 분립을 한 문명의 정신에 다시 행하신 것으로 읽는다. 가인형 노선은 헬레니즘을 르네상스로 부활시키고, 베이컨과 데카르트, 계몽사상, 헤겔 좌파와 포이어바흐를 거쳐 마르크스에 이른다. 정치에서는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들이 이끈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낳았는데, 그 혁명은 인권선언을 외치면서도 전체주의로 흘러갔다. 아벨형 노선은 헤브라이즘을 종교개혁으로 부활시키고 칸트, 웨슬리, 폭스로 이어진다. 정치에서는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운 기독교인들이 쟁취한 미국 독립을 낳았다. 어느 쪽의 민주주의든 군주제가 되어 버린 독점을 깨뜨리기 위해 존재한다 — 주님이 재림하실 때, 신념으로 성숙한 백성이 그분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뜻으로 받들어 세울 수 있도록.
『원리강론』 279쪽섭리로 읽는 세계대전
같은 움직임이 두 번 일어난다. 각 전쟁마다 사탄 편에서 3대 축복의 외적 형태를 한 단계씩 지닌 가짜가 나타나고 — 1914년에는 거짓 아담으로서의 카이저, 1939년에는 거짓 예수로서의 히틀러가, 장대한 비전과 독신 생활과 사라진 시신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 하나님 편이 그를 이긴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세 나라가 세 나라에 맞서 아담, 해와, 천사장의 입장에 선다. 미국·영국·프랑스 대 독일·일본·이탈리아.
승리할 때마다 세계적 기대가 한 단계씩 세워지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물리치신 세 가지 시험 중 하나를 세계적 차원에서 이긴다. 1918년에는 소생 단계와 첫째 시험, 1945년에는 장성 단계와 둘째 시험이다. 계산은 바로 여기서 맞아떨어진다 — 1517년부터의 400년은 1918년에 끝나고, 『원리강론』은 그 전쟁이 끝난 직후 재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가짜가 바뀌는 지점도 여기다. 히틀러는 멸망했으나 재림 때의 거짓 그리스도인 스탈린은 더 강해졌으며, 이는 영적 왕국의 시대가 닫히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읽힌다.
『원리강론』 294쪽한국, 그리고 제3이스라엘의 자격
1905~1945년『원리강론』은 그 나라를 지목한다. 동방의 나라이되,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섬기며 이 시기를 맞았고 한국 기독교를 박해한 일본도 아니고, 공산화되어 가던 중국도 아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서 1945년 해방까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한국의 40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기독교인들이 로마에서 치렀던 것과 같은 40수의 섭리다. 38선은 아브라함이 하지 못한, 쪼갠 제물로 읽힌다 — 하나님과 사탄이 맞닿는 선을 따라 둘로 잘린 나라. 그 배경에는 『정감록』과 그 정도령, 곧 참된 말씀을 가지고 오는 이에 대한 메시아 예언이 있다.
『원리강론』 316쪽『원리강론』이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을 가리는 기준
위 모든 갈림길에 깔린 원칙행실로도, 관습적인 도덕으로도 아니다 — 어떤 일이 섭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가, 아니면 섭리를 거스르는가로 가린다. 이 책이 드는 예는 일부러 불편하다. 섭리를 모르는 사람은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을 악이라 하겠지만, 『원리강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시는 방향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선한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귀결이 가장 날카로운 대목이다. 모든 종교는 선을 지향하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님 편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 시대의 사명을 받은 종교는 그 시대가 지나면 장애물이 되고, 그때 중심에 더 가까이 선 새로운 종교를 가로막으면, 이전에 얼마나 충실히 섬겼든 상관없이 사탄 편으로 넘어간다. 바로 그것이 유대교가 예수님을 박해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하며, 다음 갈림길이 바로 이 원칙에 달려 있다.
『원리강론』 293쪽기독교 세계
2,000년에 걸쳐 준비된 기독교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으며, 400년 준비 기간은 다 지났다. 그 과제는 재림주가 오실 때 그분을 알아보고, 종교 세계를 그분 뒤에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재림주를 알아보지 못한 기독교
대가: 다시 연장『원리강론』은 그 위험을 자신의 말로, 그리고 미리 밝혀 둔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구름을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은 땅에서 태어난 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 불렀던 것과 똑같이 그분을 이단이라 부를 것이다. 그분을 맞이할 권역으로 2,000년 동안 준비된 기독교는 그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
『원리강론』은 분명하게 말한다. 제2이스라엘이 그분을 배반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제3이스라엘을 택하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세계적 규모로 나타난 세례 요한의 형식이며, 2,000년이 지나서도 연표는 같은 결함에서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과가 열려 있지 않다 — 참부모를 세우시려는 섭리는 아담에서 시작되어 예수님을 거쳐 연장되었고, 원리에 따라 세 번째에는 이루어진다.
기독교 세계가 재림주를 알아보고 그분 뒤에 하나가 되며, 한 세대 안에 세계적 기대가 완성된다 —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초림 때 끝내 이르지 못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싸움, 그리고 그 결말이 정해지는 방식
지금앞의 두 전쟁이 갈라놓은 두 세계를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 하나 남아 있다. 『원리강론』은 그것이 어느 쪽으로든 치러질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 무력으로, 또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끝나는 순수한 이념의 싸움으로 — 그리고 어느 쪽이 될지는 오직 인간의 책임분담이 다하여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 이 페이지의 논지 전체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나,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원리강론』 299쪽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